mobile background
mobile background

단원의 도시에 어울리는 새로운

"별망성예술제"로 태어납니다.

고려사는 대별초가 소래전투에서 몽고군에 대승하였다 하였고 동국여지승람(권9)안산관방에 보면 1656년(효종7년) 이곳 수군만호를 강화로 옮기면서 별망성을 제1초지진 강화의 것을 제2초지진이라 했다. 이렇듯 별망성은 역사의 뿌리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산하를 면면히 지켜온 선조들의 넋이 깃든 고장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의 터전인 것이다. 그러기에 안산은 역사의 고향이요, 산업의 도시요, 예술의 도시로서 자긍심을 확고히 가짐은 물론 위로는 별망성의 『뿌리』적 이념을 심고 성호 이익 선생의 『얼』과 단원 김홍도의 『예지』와 상록수 최용신의 『봉사』정신을 하나로 묶어 안산 시민의 자존심으로 삼고자 한다. 이에 시민을 위한 행복한 복지안산이 되도록 시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향토애를 고취하고 자라는 후손들의 교육의 장으로 삼으며 범시민적 참여로 화합의 한마음으로 이끌기 위해 호국예술제의 의미를 담은 별망성예술제를 매년 개최하기로 한다.


취지선언문

일찍이 여기에 자리 잡은 별망성은 외침과 맞선 보루였다. “別”은 보통의 것과 다르다는 뜻이요. “望”은 살펴 지킨다는 뜻이니 별망성은 이 향토와 산하를 지켜온 망대였다.

- 별망성 초석비 봉천문 중에서

별망성지 유래

별망성지는 남양만을 연하여 해안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왜구를 막을 수 있는 요새지를 형성코자 독립붕의 배면 정상에서 해안선을 따라 양쪽 골짜기 사이를 돌로 쌓아 만든 해안산성이다. 평지 쪽에는 군영지로 보이는 터가 남아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1656년(효종7년)에 이곳의 초지진을 강화도로 옮겨 이곳을 1초지, 강화도의 것을 2초지라 하였다. 성 가운데에서는 청자 및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능선 끝에는 선사시대의 패총(조개무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당나라 사신의 왕래가 있었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영접사(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사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왕조 문종실록에는 이곳에 수군 민호영이 있었으나 갯벌에 밀려 선박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사곶으로 영을 옮겼다가 조선 문종 때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능인소릉이 인근 목내동에 있고 바다가 다시 깊어져 선박의 출입이 가능해지자 영을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거치는 동안 거의 파괴되어 현재는 인근의 목내산성 군자산성과 같이 이지역이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남양만을 방어하는 서해안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복원하여 높이 1.45m, 길이 225m 규모가 되었다.

단원의 도시에 어울리는 새로운 "별망성예술제"로 태어납니다.

고려사는 대별초가 소래전투에서 몽고군에 대승하였다 하였고 동국여지승람(권9)안산관방에 보면 1656년(효종7년) 이곳 수군만호를 강화로 옮기면서 별망성을 제1초지진 강화의 것을 제2초지진이라 했다. 이렇듯 별망성은 역사의 뿌리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산하를 면면히 지켜온 선조들의 넋이 깃든 고장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의 터전인 것이다. 그러기에 안산은 역사의 고향이요, 산업의 도시요, 예술의 도시로서 자긍심을 확고히 가짐은 물론 위로는 별망성의 『뿌리』적 이념을 심고 성호 이익 선생의 『얼』과 단원 김홍도의 『예지』와 상록수 최용신의 『봉사』정신을 하나로 묶어 안산 시민의 자존심으로 삼고자 한다. 이에 시민을 위한 행복한 복지안산이 되도록 시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향토애를 고취하고 자라는 후손들의 교육의 장으로 삼으며 범시민적 참여로 화합의 한마음으로 이끌기 위해 호국예술제의 의미를 담은 별망성예술제를 매년 개최하기로 한다.


취지선언문

일찍이 여기에 자리 잡은 별망성은 외침과 맞선 보루였다.

“別”은 보통의 것과 다르다는 뜻이요

“望”은 살펴 지킨다는 뜻이니

별망성은 이 향토와 산하를 지켜온 망대였다.

-별망성 초석비 봉천문 중에서

별망성지 유래

별망성지는 남양만을 연하여 해안으로 침입하는 몽고군과 왜구를 막을 수 있는 요새지를 형성코자 독립붕의 배면 정상에서 해안선을 따라 양쪽 골짜기 사이를 돌로 쌓아 만든 해안산성이다. 평지 쪽에는 군영지로 보이는 터가 남아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1656년(효종7년)에 이곳의 초지진을 강화도로 옮겨 이곳을 1초지, 강화도의 것을 2초지라 하였다. 성 가운데에서는 청자 및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능선 끝에는 선사시대의 패총(조개무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당나라 사신의 왕래가 있었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영접사(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사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왕조 문종실록에는 이곳에 수군 민호영이 있었으나 갯벌에 밀려 선박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사곶으로 영을 옮겼다가 조선 문종 때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능인소릉이 인근 목내동에 있고 바다가 다시 깊어져 선박의 출입이 가능해지자 영을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거치는 동안 거의 파괴되어 현재는 인근의 목내산성 군자산성과 같이 이지역이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남양만을 방어하는 서해안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복원하여 높이 1.45m, 길이 225m 규모가 되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랑로 312 안산문화예술의전당내

T. 031-485-3844, 031-483-3845

F. 031-482-5061|E. ansanyechong@naver.com


Copyright © Ansan Yehchong. All rights Reserved.

A. (15355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랑로 312 안산문화예술의전당내

T. 031-485-3844, 031-483-3845|F. 031-482-5061|E. ansanyechong@naver.com


Copyright © Ansan Yehchong. All rights Reserved.